도쿄국립박물관은 한 번에 완성된 박물관이 아니라 1909년부터 1999년까지 시대마다 다른 건축 언어가 차곡차곡 더해진 공간이다. 효케이관, 본관, 동양관, 호류지보물관은 각각 서구화, 정체성 회복, 동양미의 해석, 보존과 공개라는 고민을 건축으로 남겼다.
[내용]
도쿄국립박물관 건축 특징을 처음 마주하면 단순히 “오래된 박물관이구나” 하고 지나치기 어렵다. 우에노 공원 북쪽의 한 부지 안에 1909년부터 1999년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건물이 차례로 놓여 있고, 그 사이에는 단순한 증축이 아니라 앞선 건물과 다음 건물이 서로 대화하는 듯한 긴장이 흐른다.
서울의 많은 건축이 새로 짓고, 고치고, 빠르게 바꾸는 방식으로 도시의 속도를 보여준다면, 도쿄국립박물관은 조금 다르다. 이곳은 기존 건물을 쉽게 지우지 않고, 그 옆에 다음 시대의 답을 조심스럽게 얹어왔다. 그래서 도쿄국립박물관은 건물 하나를 보는 장소라기보다, 90년에 걸친 공간 기획의 판단을 읽는 장소에 가깝다.
도쿄국립박물관이 특별한 이유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처음부터 완벽한 마스터플랜으로 다섯 개 건물을 한꺼번에 세운 공간이 아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하나씩 더해졌고, 그때마다 기획자들은 같은 질문 앞에 섰다. 이미 무언가가 들어선 땅 위에 다음 건물을 어떻게 올릴 것인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건축이 단순히 외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선 시대의 건물이 만든 분위기, 축선, 시야, 재료감, 상징성을 모두 읽은 뒤 그다음 건물이 들어서야 했다. 무심코 새 건물을 놓으면 부지는 흐트러지고, 지나치게 옛 건물에만 맞추면 자기 시대의 목소리를 잃는다.
왼쪽에는 1909년의 효케이관, 정면에는 1938년의 본관, 오른쪽에는 1968년의 동양관이 자리한다. 여기에 1999년의 호류지보물관과 헤이세이관까지 더해지면서 이 부지는 박물관이면서 동시에 시대별 건축 언어가 쌓인 거대한 기록물이 되었다.
효케이관은 메이지 시대가 유럽을 향해 보낸 선언처럼 보인다
도쿄국립박물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본관이 아니라 효케이관이다. 1909년, 훗날 다이쇼 천황이 되는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해 세워진 이 건물은 일본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했던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네오바로크풍 외관, 대칭적인 구성, 입구의 사자 조각, 세월을 먹고 푸르게 변한 돔은 당시 일본이 유럽식 건축을 얼마나 강하게 의식했는지 보여준다. 막상 앞에 서면 장식이 많은데도 가볍지 않고, 오히려 국가적 메시지를 정면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은 이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 박물관의 상징이던 벽돌조 건물이 무너지면서, 서양식 건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효케이관은 살아남았지만, 그 이후 들어설 건물들은 더 이상 단순한 서구 모방으로 갈 수 없었다.
본관은 무너진 서양식 건축 위에 일본식 정체성을 덧씌운 건물이다
1938년에 완성된 도쿄국립박물관 본관은 관동대지진 이후의 답처럼 등장한다. 설계 공모를 거쳐 지어진 이 건물에는 단순한 박물관 재건 이상의 의미가 담겼다. 무너진 서양식 벽돌 건축 대신, 일본은 무엇을 자기 건축의 얼굴로 삼을 것인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서양식 콘크리트 구조 위에 일본식 지붕을 얹은 재관양식이다. 양복을 입고 갓을 쓴 사람처럼 어딘가 어색하지만, 바로 그 어색함이 당시 일본 사회의 정체성 고민을 드러낸다. 이 건물을 단순히 전통적인 일본풍 박물관으로만 보면, 그 안에 담긴 시대적 불안과 정치적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본관 내부의 대리석 계단과 웰홀은 지금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중앙 홀에 들어서면 천장까지 이어지는 아치, 돌바닥에 울리는 발소리, 넓게 펼쳐지는 계단이 몸을 먼저 압도한다. 이 공간이 여러 광고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쓰인 이유도 이해된다.
전시 동선 역시 일본 미술의 흐름을 몸으로 따라가게 만든다. 1층과 2층을 이동하며 조각, 도자, 칠기, 일본미의 연대기를 지나가다 보면 박물관이 단순히 유물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기억할 것인가”를 설계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양관은 콘크리트로 번역한 실크로드의 창고 같다
1968년에 들어선 동양관은 본관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고도성장기의 일본이 자신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인식하던 시기, 동양관은 그 자신감을 건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설계자는 다니구치 요시로. 전통과 모더니즘을 한 건물 안에 어떻게 공존시킬 것인가를 오래 고민한 인물이다.
동양관의 외관은 얼핏 콘크리트 건물인데, 자세히 보면 목조 건축의 기억이 배어 있다. 깊게 돌출된 처마, 기둥 상단의 형태, 격자 루버, 은근한 박공 지붕의 기울기까지 모두 전통 건축의 감각을 현대 재료로 옮긴 장치처럼 보인다.
내부는 더 흥미롭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이어지는 구조 사이에 중간층을 끼워 넣은 스키플로어 방식이라, 관람 동선이 단순히 위아래로 나뉘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천장 높이와 빛의 온도가 달라지고, 공간은 마치 동굴처럼 깊어졌다가 다시 열리는 리듬을 만든다.
이 동선은 중국, 한반도, 동남아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이집트로 이어지는 동양 미술의 흐름을 따라가게 만든다. 전시를 보며 걷다 보면 동양관이 단순한 전시실이 아니라 실크로드를 압축한 건축적 여행처럼 느껴진다.
호류지보물관은 건축이 스스로 조용해지는 방식으로 유물을 살린다
1999년에 완성된 호류지보물관은 도쿄국립박물관 안에서도 가장 조용한 긴장을 가진 건물이다. 이곳은 나라 호류지가 황실에 헌납한 300여 점의 유물을 보관하고 공개하기 위한 공간이다. 7~8세기 아스카·나라 시대의 금동불과 목조 조각처럼 예민하고 오래된 보물이 중심이다.
설계자는 다니구치 요시오다. 동양관을 설계한 다니구치 요시로의 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전통과 모더니즘을 나란히 세우는 방식으로 답을 냈다면, 아들은 호류지보물관에서 건축이 최대한 조용해지는 길을 택했다. 유물이 말하게 하고, 건물은 뒤로 물러나는 방식이다.
입구 앞의 얕고 넓은 수반, 대각선으로 놓인 석제 통로, 정면으로 곧장 밀고 들어가지 않게 만드는 동선은 모두 의도된 장치다. 직선으로 들어가고 싶은 몸을 살짝 비틀게 만들고, 그 사이에 물과 빛, 건물의 반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내부는 유리와 알루미늄의 현대적 외피 안에 라임스톤 전시 박스를 넣은 이중 구조다. 온도, 습도, 자외선을 통제하면서도 관람객에게 유물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 공간이 일주일에 한 번만 열릴 정도로 보존에 민감했다면, 새 보물관은 보존과 공개라는 충돌하는 조건을 건축적으로 풀어낸 셈이다.
도쿄국립박물관을 다르게 보는 방법
건물을 예쁘다, 웅장하다 정도로만 보지 말고 “왜 이 위치에, 왜 이 시기에, 왜 이런 형태로 들어왔을까”를 따라가면 공간이 훨씬 입체적으로 읽힌다.
헤이세이관까지 더해지며 도쿄국립박물관은 시대의 층을 완성한다
본관 뒤편의 헤이세이관은 1999년에 완공됐다.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해 기획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1909년 다이쇼 천황의 결혼을 기념해 세워진 효케이관과 묘하게 이어진다. 90년의 간격을 두고 황실의 두 세대가 한 부지 안에 건축으로 남은 셈이다.
이런 구성이 흥미로운 이유는 도쿄국립박물관이 단순히 유물을 보관하는 공간을 넘어, 일본이 각 시대마다 어떤 상징을 건축으로 남기려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효케이관은 서구를 향한 열망, 본관은 재난 이후의 정체성, 동양관은 아시아를 향한 시선, 호류지보물관은 보존과 공개의 균형을 말한다.
막상 이 흐름을 알고 경내를 걸으면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건물 하나하나가 따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선 건물이 던진 질문에 다음 건물이 조용히 답하는 구조처럼 느껴진다.
도쿄 건축 여행에서 이곳을 먼저 봐야 하는 이유
도쿄국립박물관은 유명한 전시품 때문에만 갈 곳이 아니다. 도쿄 건축 여행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곳은 도시를 읽는 출발점에 가깝다. 새것만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과 협상하며 다음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과 도쿄의 차이를 단순히 스카이라인이나 규모로만 비교하면 놓치는 것이 많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것을 남기는 방식, 새 건물이 들어올 때 기존 질서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공간이 사람에게 어떤 감각을 남기는지다.
도쿄국립박물관의 진짜 매력은 건축물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시대의 판단이 보인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곳을 보고 나면 도쿄의 다른 건물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이걸 누가 왜 이렇게 지었을까”라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효케이관의 녹색 돔, 본관의 웰홀 계단, 동양관의 콘크리트 기둥, 호류지보물관의 비틀어진 진입로는 모두 각 시대의 기획자가 남긴 답이다. 그리고 그 답들이 한 부지 안에 나란히 서 있기 때문에 도쿄국립박물관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도시와 건축을 이해하는 꽤 좋은 교과서처럼 남는다.
노후자금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돈 이야기는 갑자기 무거워진다. 젊을 때처럼 다시 벌면 된다고 넘기기 어렵고, 한 번의 선택이 앞으로의 생활 리듬까지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경매 투자나 부동산 강의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잘만 배우면 남들보다 싸게 사고,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 기대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책을 냈거나 강의를 오래 했거나,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맡기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이 생긴다. 처음에는 믿을 만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상한 부분이 하나씩 보인다. 사기는 처음부터 무섭게 다가오지 않고, 대부분 꽤 그럴듯한 얼굴로 시작된다.
유명하다는 말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것
경매나 부동산 투자 분야에서는 ‘누가 말했느냐’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 책을 냈다거나, 강의장이 가득 찼다거나, 수강생 후기가 많다는 말은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다. 특히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사람처럼 보이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유명세는 신뢰의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돈을 맡기는 근거가 되면 위험하다. 경매 실력과 자금 운용의 투명성은 전혀 다른 문제다. 강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내 돈을 안전하게 관리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막상 피해 사례를 보면 처음부터 허술해 보인 경우보다, 오히려 말이 너무 매끄럽고 자료가 그럴듯했던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늦게 의심하고, 더 크게 흔들린다.
수익을 보장한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멈춰야 한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의외로 단순하다. “손해 볼 일이 없다”, “확정 수익이다”, “원금은 안전하다” 같은 표현이다. 경매든 부동산이든 시장 가격, 권리관계, 명도, 세금, 대출, 공실 같은 변수가 따라온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과정을 지나치게 쉽게 설명한다면 한 번쯤 의심해야 한다.
특히 50대·60대는 은퇴 이후 현금흐름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크다. 월세 수익, 단기 차익, 안정적인 노후 대비 같은 말이 붙으면 마음이 움직인다. 하지만 투자에서 안정이라는 단어는 계약서와 구조로 확인해야지, 설명만 듣고 믿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무조건”, “확정”, “보장”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면 그 제안은 투자보다 사기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
입금을 서두르게 만드는 분위기는 늘 위험하다
사기성 투자 권유에는 이상하게 시간이 없다. 오늘 결정해야 하고, 지금 넣어야 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어렵다고 말한다. 듣는 사람은 조급해진다. 남들은 이미 들어갔고, 나만 늦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제대로 된 투자는 서두르지 않아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등기부등본, 계약서, 자금 흐름, 사업자 정보, 실제 물건 정보, 수익 구조를 차분히 볼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가 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신호다.
계약서를 보기 전에 입금부터 요구한다.
가족이나 전문가와 상의하지 말라고 분위기를 만든다.
오늘 안에 결정해야 수익이 난다고 압박한다.
투자금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장면에서는 체면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분위기가 어색해져도 잠깐 멈추는 쪽이 낫다. 돈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되돌리는 과정이 훨씬 어렵다.
말보다 서류가 먼저 보여야 하는 순간
경매 투자나 부동산 공동투자 제안에서는 설명보다 서류가 먼저다. 실제 물건의 권리관계, 투자금이 들어가는 계좌, 계약 주체, 수익 배분 방식, 손실 발생 시 책임 구조가 문서로 남아야 한다. 말로만 이해되는 투자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킬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복잡한 구조를 쉽게 믿게 만들 때 더 조심해야 한다
경매 투자는 원래 복잡하다. 권리분석, 낙찰가 판단, 점유자 문제, 대출 가능성, 세금까지 봐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어 보여주면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 어렵게 설명해야 할 부분을 일부러 빼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다 알아서 한다”는 말도 듣기에는 편하다. 하지만 내 돈이 들어가는 순간, 최소한의 구조는 내가 이해해야 한다. 정확히 어떤 물건에 투자하는지, 내 이름으로 권리가 생기는지, 수익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손실이 나면 누가 책임지는지 정도는 직접 확인해야 한다.
처음엔 몰라도 괜찮다. 다만 모르는 상태로 돈을 보내면 안 된다. 모르면 물어보고, 답이 흐리면 멈추고, 그래도 불안하면 제3자에게 보여줘야 한다.
50대·60대에게 더 위험한 이유는 돈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투자금과 은퇴를 앞둔 세대의 투자금은 무게가 다르다. 50대·60대의 돈은 자녀 결혼, 노후 생활비, 병원비, 주거 안정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손실이 나도 다시 회복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다.
사기꾼들은 이 마음을 잘 안다. 불안한 노후, 낮은 예금이자, 집값 상승 경험, 주변의 투자 성공담을 자극한다.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만들고, 그 틈에서 판단을 흐리게 한다.
50대·60대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많이 버는 것보다 크게 잃지 않는 것이다.
수익률이 조금 낮아도 구조가 단순하고, 내 권리가 명확하고, 언제든 확인 가능한 투자가 훨씬 낫다. 반대로 수익률은 높은데 설명이 복잡하고, 계좌와 계약 주체가 불분명하다면 한 발 물러나는 편이 안전하다.
사기 시그널 5가지는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경매 투자 사기를 피하려면 거창한 전문지식보다 먼저 봐야 할 신호가 있다. 유명세에 기대는지, 수익을 보장하는지, 입금을 재촉하는지, 구조가 불투명한지, 질문을 불편해하는지를 보면 된다. 이 다섯 가지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상대가 내 판단 시간을 빼앗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정상적인 투자는 질문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인할수록 구조가 선명해진다. 반대로 사기에 가까운 제안은 질문이 많아질수록 말이 흔들리고,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들고, 기회를 놓친다는 식으로 압박한다.
유명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맡기지 않는다.
원금 보장과 확정 수익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지 않는다.
오늘 입금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면 멈춘다.
계약서와 계좌, 권리관계를 가족이나 전문가에게 보여준다.
이해되지 않는 투자는 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세운다.
보이는 실력보다 중요한 건 내 돈이 어디로 가는지다
경매 강의나 부동산 콘텐츠를 보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배우면 자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공부와 투자를 구분하지 못할 때 생긴다. 강의를 듣는 것과 돈을 맡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누군가의 말솜씨가 뛰어나고, 사례가 화려하고, 주변 사람이 박수를 보내더라도 마지막에는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내 돈은 어디로 가는가. 내 권리는 무엇으로 남는가. 손실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이 흐리면 더 들을 필요가 없다.
투자에서 가장 필요한 건 대단한 감이 아니라 멈출 수 있는 용기다. 특히 노후자금이 걸린 결정이라면,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잘못된 기회를 잡는 일이 훨씬 더 아프게 남는다.
세 영화를 좀더 비교해보자. <더 헌트>는 이중 사건의 인과관계를 가장 뚜렷이 명시한다. 유치원 선생인 루카스(마스 미켈센)가 한 어린이의 거짓말로 인해 아동 성추행의 누명을 쓴다. 종국엔 그가 무고하다는 것이 밝혀지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가해자로 낙인찍은 지 오래다. 시간이 흘러도 루카스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자신이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에서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지휘자라는 권력을 이용해 오케스트라의 어린 여성 단원들과 사적 관계를 맺고, 관계가 틀어진 이가 다른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없게 손을 쓴다. 전적이 밝혀진 뒤 그는 지휘자 자격을 박탈당한 채 해외로 주거지를 옮긴다.
<애프터 더 헌트>의 배경은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9년이다. 예일대학교 철학과 부교수인 알마와 그의 동료 헨릭(앤드루 가필드), 제자 매기(아요 에데비리) 셋의 관계가 중심인데 어느 날 밤 매기가 알마를 찾아와 헨릭이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고백한다. 그 사실을 안 헨릭 역시 알마에게 자신의 무고를 어필한다. 알마는 당황해하며 둘에게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나에게 이야기해?” 전술했듯 알마는 매기의 고백이 없었다면 사건과 완전히 무관했을 자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목격자도 아니며 종신 재직권 발표를 앞두고 어떤 문제에도 엮이지 않고 싶어 하는 부교수에 불과하다. 헨릭과 재직권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이기에 이 사건으로 헨릭에게 오점이 남는다면 알마에겐 득이 되겠지만, 학계의 일원으로서 알마는 오히려 배신자라는 오명을 얻게 될 것을 더 두려워한다.
의외의 설정은 성폭행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헨릭과 매기,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당시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술은 헨릭과 알마, 매기와 알마 일대일로 구성된 사적 자리에서만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영화의 중반부에 이르러 가해자인 헨릭은 극에서 이르게 퇴장한다. 원인 제공자를 일찍이 탈각시켜 가해자-피해자의 익숙한 구도 대신 피해자와 증언자 두 사람을 심판대에 올리는데, 결과적으로 알마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이들의 발언만을 토대로 판단해 증언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와 <애프터 더 헌트>는 타르와 알마가 현실을 감내하는 상황을 유사하게 묘사한다. 마사지숍의 제안에 따라 여성 마사지사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타르는 역겨움을 느껴 뛰쳐나가고 이내 구토한다. 위궤양을 앓는 알마도 종종 화장실로 뛰쳐나가 구역질을 한다. 타르의 구토가 착취를 자행하던 스스로에게 느낀 역겨움을 표출한 것에 가깝다면 알마의 것은 반대로 외부 압력을 삼키다 걸린 과부하에 가깝다. 알마는 결벽증처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길 꺼린다. 하다못해 스트레스로 얻었을 위궤양까지 숨긴 채 동료 의료인의 처방전을 훔쳐 약을 처방받는다. 결국 그것이 악재로 작용할 텐데도 말이다.
결벽증적인 알마의 태도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의 수업 내용에서 일말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한 수업에서 파놉티콘을 설명하며 권력이 어떻게 개인화돼 스스로를 통제하게 하는지를 논한다. 다른 수업에서는 ‘거짓된 세상에 올바른 삶은 없다’는 <미니마 모랄리아>의 문구를 인용한다. 세상이 거짓됐을지라도 그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는 아도르노의 비관적 입장에 한 학생은 해나 아렌트의 오디세우스의 역설로 대응한다. 지금 당장 무엇이 옳은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행동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올바름은 오디세우스의 경우처럼 후대에 평가받지 않겠냐는 태도로. 설전이 이어지자 결국 알마는 화를 내며 교권을 이용해 학생을 압박한다.
알마는 자신이 경험한 여성혐오의 테제, 학계 시스템을 그대로 체화한 사람이다. 헨릭은 “알마가 여자라는 이유로 종신 재직권을 얻어낼 가능성이 높다”고 농담조로 말하고 한 남학생은 알마 앞에서 학교에서 겪는 역차별을 불평한다. 알마와 헨릭이 위시하는 여성 학자, 남성 학자의 위치를 상상케 하는 발언들이지만 알마의 대처는 미온적이다. 알마는 과거 자신이 경험한 성폭력 사건을 남편에게 고백할 때마저 상대 남성 대신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린다. 그런 알마가 매기를 지지하길 주저하자 그는 “알마가 폭력적인 가부장적 의제에 굴복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이뤄냈”고 자신은 그런 백인 여성에게 차별받은 흑인 여성이 됐다며 알마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알마는 “고백과 회개가 담긴 기사”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간이 흐른 후 종신 재직권을 얻어 학장이 된 알마,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와 결혼을 앞둔 레즈비언으로서 곧 부르주아 계층의 일원이 될 매기의 재회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결말을 목도한 평단은 <애프터 더 헌트>가 정작 “중요한 장면은 보여주지 않고 마무리됐다”고 입을 모은다. 헨릭이 매기를 성폭행했는지에 관한 진실, 알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재기에 성공해 학장까지 올랐는지에 관한 과정이 생략된 탓이다. 그러나 <애프터 더 헌트>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시비를 가릴 주요 장면들이 삭제된 이유 자체일 테다.
‘사냥’의 진정한 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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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정세를 반영해 2025년, 영화의 결말을 바꿔 알마의 성공을 묘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성공한 알마와 매기의 재회가 마무리된 후 영화는 ‘컷!’ 하는 감독의 외침과 함께 마무리된다. 영화의 결말부 혹은 영화 자체가 일종의 극중극, 편집된 가상의 세계일지 모른다는 걸 암시하는 사운드다. <애프터 더 헌트>가 편집된 결과물이라는 가정하에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성폭행 사건의 진실, 논문 표절 건을 두고 헨릭과 매기 사이에 오갔다는 공방, 진위를 밝히거나 서사의 클라이맥스가 될 주요 순간들은 들어낸 채 영화는 교묘히 알마를 중심으로 회상하듯 구성되어 있다. 오디세우스의 서사처럼 학장이 된 알마의 성공담을 누군가가 서사화한 것은 아닐까. 결말부의 시간차를 고려할 때 이 내용은 알마가 썼다는 “고백과 회개가 담긴 기사”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지우고 드러내는 것이 효과적일지 분석된 결과물 말이다.
16~17세기엔 ‘애프터 더 헌트’라는 주제의 화풍이 유행했다. 문자 그대로 사냥 이후의 귀족들과 그들이 사용한 장비, 죽은 사냥감들을 배치한 그림이다. 권력 과시용답게 귀족들이 승리감에 도취돼 자신의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구성이 다수였다. 이 화풍과 영화 속 한 장면을 대조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해고를 통보받은 헨릭은 알마의 교실에 쳐들어와 어째서 알마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지 항의한다. 놀라 뛰쳐나온 매기와 교실의 학생들에게도 분노를 표출한다. 이후 교실에서 뛰쳐나가 우는 매기를 알마가 달래준다. 위로하는 알마의 품에서 매기는 돌연 시선을 들어올리고, 그의 시점숏엔 이들을 내려다보듯 서 있는 학교 동상이 있다. 각본가의 말을 빌리자면 이 동상은 “예일대 설립자 중 한명이자 노예 소유주였던 사람의 동상”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알마와 매기에겐 교집합이 존재한다. 알마는 교내 기준을 체화하는 방식으로, 매기는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알마가 자신의 논문 표절 건을 언급할 수 없게 만들며 원하는 바를 얻었다. 이들의 결말은 성공 서사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이 거친 차별과 희생을 상기한다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면서도 결국 불합리한 시스템에 복무하는 형태로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 결과적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음을 상기한다면 진정 ‘사냥’에 성공한 승자는 누구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된다.
[스포츠조선 이게은기자] 개그맨 이경규의 딸 이예림이 결혼 6년 차에도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를 밝혔다.
2일 '갓경규' 채널에는 '아무리 내 딸이지만.. 아기 때문에 이경규와 싸울 뻔한 딸 예림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공개됐다.
이날 이경규, 이예림 부녀는 아동복 브랜드 윤소영 대표를 만나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경규는 아직 자녀가 없는 이예림을 향해 윤 대표에게 궁금한 게 없냐고 질문했다. 윤 대표는 자녀가 다섯 명이라고.
이예림은 "저는 아기에 대해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 질문도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윤 대표는 "아기 계획이 없나"라고 궁금해했고 이예림은 "그것도 고민이다.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한다"라고 답했다. 화들짝 놀란 이경규는 "미안합니다. 잘못 키웠습니다"라며 눈을 질끈 감아 웃음을 안겼다.
이예림은 "강아지만 예뻐하다 보니,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야하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털어놨다. 이경규는 "경력 단절도 있지 않나"라고 이예림을 이해하면서도 "아이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왜 좋아하지 않니"라고 궁금해했다.
이예림은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엄청 강하다. 강아지도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사람은 더 손이 많이 가지 않나. 그런 거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이경규는 "난 손주를 낳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낳으라는 권유도 안 한다"라면서도 "노력을 해도 애가 안 생기면 어쩔 수 없지만, 결혼을 했으면 애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라고 다시금 속마음을 전했다.
11월 26일 ‘행가집’ 채널에는 ‘사랑의 결실? 남산뷰 77평 마포아파트, 개그맨 김재우 조유리 부부의 깔끔 세련 하우스’라는 제목의 영상이 공개됐다.
영상에서 김재우, 조유리 부부는 최근 이사한 서울 마포구의 77평 아파트를 공개했다. 누구의 취향이 반영된 인테리어냐는 질문에 조유리는 “저의 의견과 신랑의 의견이 함께”라고 답했지만, 김재우는 “아내 취향 98%, 제 지분은 2% 들어가 있다”라고 폭로했다.
조유리는 “77평에 방 3개, 화장실이 원래 3개였다”라고 집을 소개했고, 김재우는 “좀 오래된 아파트여서 인테리어하면서 이렇게 우물형으로 천장도 올리고 들어오는 시야 확보하는 것 때문에 좀 고생했는데 잘한 것 같다”라고 만족했다.
사진=‘행가집’ 채널 영상 캡처
부부의 집은 남산뷰에 포근한 감성의 화이트톤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조유리는 “최근에 반한 게 남산뷰다. 63빌딩, 한강이 다 보이는데 너무 들어오고 싶은 거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해가 뜨는 게 보인다. 보라색이라든지 주황색 빛으로 시작이 되는데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아서 아침에 여기 앉아서 차도 마시고, 그냥 앉아 있는다”라고 털어놨다.
조유리는 거실 테이블에 대해 “공간을 처음 만들 때 하얀색 톤으로 은은하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해서 상판 컬러를 따뜻한 화이트로 하게 됐고 반짝이는 재질보다는 매트한 재질을 선택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김재우는 “이런 데 김칫국물 하나 흘리면 이런 의자가 끝나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재를 패브릭으로 해서 포근하고 따뜻한 아내를 닮은 가구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라고 애처가 면모를 드러냈다.
거실 소파에 대해서도 김재우는 “아내한테 제가 선물하는 선물 같은 인테리어였다. 아내를 닮은 집이 나와서 그게 저는 너무 좋다”라고 만족했다.
사진=‘행가집’ 채널 영상 캡처
클래식한 그릇이 가득한 고급스러운 진열장을 공개한 김재우는 “아내가 그릇 수집하는 걸 엄청 좋아했는데 둘 데가 없어서 맨날 쌓아두고만 있었다. 이제 하나하나 세상 밖으로 나와서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되게 뿌듯하더라”고 설명했다.
수납장에 가득한 카레가 등장하자, 김재우는 “이사 오고 나서 많이 비운 거다. 그 전에는 전국의 카레가 다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엄청난 종류와 양의 영양제 컬렉션도 공개됐다.
부부 침실에는 부부의 OOTD 촬영용 거울이 세련된 분위기를 더했고, 모던 프렌치 스타일 욕실이 감탄을 자아냈다. 김재우는 “아내가 가장 힘들어할 때 제가 통장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같이 여행을 다녔다. 1년 뒤 재우, 유리한테 맡기고 지금은 당신 힘든 거부터 잊자고 전 세계를 다녔다. 그때 아내가 ‘나는 이런 타일의 화장실에서 살아봤으면 좋겠어’, ‘이런 수전 써봤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때 우리를 웃게했던 추억들을 다 합쳐서 꿈의 화장실로 만든 거다”라고 말했다.
부부는 현재 개별 침대를 이용 중이라고 밝혔다. 조유리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가니까 서로의 숙면이 중요하더라. 고민하다가 따로 자게 됐다”라고 말했고, 김재우도 “따로 자니까 처음에는 좀 서운했는데 오히려 숙면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라고 공감했다.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년)에겐 '20세기를 대표하는 보헤미안 작가'라는 명칭이 뒤따른다. 야수파, 입체파, 아프리카 미술 등 다양한 미술 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생전엔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야 명성이 높아진 비운의 화가이기도 하다. 특히 사랑하는 아내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의 초상화는 유명하다. 늘 자신을 이해해주고 응원했던 잔의 헌신적인 내조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던 모딜리아니는 3년의 결혼 생활동안 잔을 뮤즈로 20점이 넘는 초상화를 그렸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PortraitofJeanneHebuterneinalargehat). 1918~1919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55 x 가로 37.5cm. 개인 소장.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폴 세잔과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은 모딜리아니는 인물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진 않았다. 긴 목에 길쭉하고 갸름한 무표정한 얼굴, 왜곡된 인체 비례, 우아한 어깨선, 아몬드 형태에 눈동자가 없는 텅빈 눈 등이 특징이다. 코와 손가락, 팔목도 가늘고 길다. 선은 가늘지만 힘이 느껴진다. 얼굴보다 훨씬 큰 모자, 모자의 챙처럼 둥글게 그려진 어깨에선 부드러운 균형미와 율동미가 느껴진다. 검은 모자와 옷, 갈색의 머리와 배경은 차분함을 더한다. 아프리카 토속 조각 같다.
영혼을 담은 듯한, 그려지지 않고 흐릿한 눈동자는 깊은 사연을 간직하는 듯 오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수에 젖은 표정과 초점 없는 초상화는 모딜리아니의 트레이드 마크다. 모딜리아니는 잔에게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난 후에야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했다. 드러난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한 그는 눈앞에 서있는 모델의 내밀한 부분까지 알 수 없다면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눈을 본질의 세계로 통하는 매개체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피카소의 초상'. 1915년. 판지에 유채. 34.2 x 26.5cm. 개인 소장.
1884년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지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술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몸이 병약했다. 피렌체 누드 미술학교, 베니스 미술학교를 거친 그가 당시 아방가르드(전위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몽마르트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 정착한 건 1906년이다. 아방가르드가 주류인 세상에서 그는 사람들의 관심사 밖이었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속에서 마약에 중독됐으며, 서서히 피폐한 삶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예술 인생에서 스승 역할을 한 사람은 알베르토 자코메티, 헨리 무어 등과 함께 20세기 현대 조각가의 대표로 꼽히는 루마니아 출신 콘스탄틴 브랑쿠시다. 추상 조각의 거장 브랑쿠시는 핵심만 남겨두고 모두 과감하게 버리는, 형상의 단순화가 특징이었다. 모딜리아니는 그로부터 조각을 배웠으나 비싼 재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조각을 포기하고 회화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특유의 인물화는 브랑쿠시로부터 배운 조각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의 열정을 눈여겨본 친구의 도움으로 모딜리아니는 1917년 12월 한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화랑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쇼윈도에 누드 2점을 걸었지만, 경찰이 이를 풍기 문란이라며 철거할 것을 명령하며 개인전은 실패로 끝난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Nucouche). 1917년. 캔버스에 유채. 89.5 x 146.7cm. 개인 소장.
'누 쿠셰'(Nu couche)로 불리는 '누워있는 나부(裸婦)'는 1917년에 그린 유화 작품으로,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가장 널리 복제되고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영국 가디언지의 미술 평론가 조너선 존스는 모딜리아니가 티치아노의 ' 우르비노의 비너스' 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며,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인체를 미화하는 동시에 성적 매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는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 의해 재창조된다.
모딜리아니는 1917년 파리 몽파르나스 카페에서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의 소개로 모델이자 화가 지망생인 19세의 잔 에뷔테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동거한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짧았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돼 1920년 사망한다,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었던 잔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를 따라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둘은 현재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에 함께 안장돼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막 영광을 움켜쥐려는 순간,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라고, 잔의 묘비에는 "목숨까지 바친 헌신적인 동반자"라고 씌여있다.
36세의 짧은 삶에 300여점의 작품을 남긴 모딜리아니. 파리의 뒷골목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초상화를 즐겨 그린 그는 사후에야 주목받게 되면서 작품가격 또한 천정부지로 뛰었다.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누워있는 나부' 가 1억7040만달러에 팔려 당시 세계 미술 작품 경매 사상 두번째로 비싼 작품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전남 완도군 평일도의 모습. 다시마 수확철인 6월에 찍은 사진이다. 약 3m까지 자란 다시마를 끌어올려 자갈밭 위에서 말린다. 바닷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그물을 덮는다./김영근 기자
지난 2일 오전 전남 완도군 평일도(平日島) 용항(龍項)마을. 마을에 들어서자 알록달록 새로 지은 집 9채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용항신도시예요.” 주민 천지호(44)씨가 웃으며 말했다.
재잘재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노란색 스쿨버스가 도착하자 어린이 11명이 차례로 올라탔다. 스쿨버스는 10분 거리에 있는 금일동초등학교를 오간다.
평일도는 완도 당목항에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 섬이다. 크기는 서울 여의도의 6.5배쯤 된다. 여기에 주민 3400여 명이 산다. 어촌이지만 초등학교가 2곳, 중학교·고등학교가 각 1곳씩 있다. 학생은 200명 정도다. 그런 평일도에서도 아이들이 많은 동네가 용항마을이다.
용항마을도 예전엔 여느 어촌처럼 아이 목소리 듣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15년 전만 해도 용항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62세였다.
그래픽=이진영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직후인 2010년 들어 반전이 일어났다. 마을을 떠나 도시로 나간 20~40대 청년들이 하나둘 되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용항마을 청년은 모두 14명. 이들이 가정을 이루며 귀어(歸漁) 가족은 이제 총 32명이 됐다. 용항마을 주민(77명)의 41%다.
이유는 다시마였다. 평일도의 별명은 ‘다시마섬’. 올해 국내에서 생산한 건(乾)다시마 4462t 중 2600t(58%)이 평일도에서 나왔다. 마트에서 파는 국내산 다시마 10개 중 6개는 평일도산이란 얘기다. 농심도 너구리 라면에 평일도 다시마를 넣는다.
주로 육수를 내는 데 쓰는 다시마는 김이나 전복만큼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수산물이다. 도매가가 1㎏에 1만2000원 수준이다. 주민들은 “평일도에선 밭작물을 거의 안 키운다”며 “자투리땅만 있어도 다시마를 펼쳐 놓고 말린다”고 했다.
평일도는 1970년대 국내 최초로 다시마 양식을 시작한 섬이다. 남해 청정 해역에 있는 데다 섬이 불가사리처럼 생겨 파도도 잔잔하다. 앞바다에 부표를 띄워 네모난 구획을 만들고 줄을 매달아 다시마를 키운다. 겨울철 줄에 씨를 붙이면 6월에 약 3m 길이로 자란다. 그때 건져 올려 해풍에 잘 말린 뒤 내다 판다.
독자 제공“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지난 2일 오전 전남 완도군 평일도 용항마을. 아이들이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있다.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어촌에서 이례적인 모습이다.
15년 전 귀어한 청년들은 이제 아이 아빠가 됐다. 2009년 서울살이 16년 만에 용항마을로 돌아온 이재민(43)씨는 “서울에서 공장 일, 건설 일, 택시 운전 등등 안 해본 게 없지만 항상 힘들었다”며 “여기서 다시마 키우고 낚시하며 안정을 찾고 결혼까지 했다”고 했다. 그는 “평일도는 보물 다시마가 있으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이씨는 이번 추석 때 친척 20여 명을 초대해 직접 낚은 감성돔 120마리를 대접했다고 한다.
서울이 고향인 윤선희(42)씨는 10년 전 남편 따라 평일도에 정착했다. 평일도에서 2남 1녀를 낳아 키우고 있다. 윤씨는 “2층짜리 집을 짓고 앞마당에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었다”며 “처음에는 섬에서 어떻게 사나 걱정했는데 내려오길 잘했다”고 했다. 집 대문에는 ‘행복한 집’이란 문패도 걸었다.
청년들이 모이자 영세했던 다시마 양식업도 업그레이드됐다. 동네 노인들을 설득해 소규모 양식 면허를 사들였다. 규모를 키우기 위한 전략이었다. 예전에는 한 사람이 다시마도 조금, 김도 조금 문어발식으로 키워 품에 비해 소출이 적었다. 청년들은 집집마다 주력으로 키울 해조류를 나눴다.
올해 평일도 건다시마 어가 200여 곳이 올린 매출은 약 176억원이다. 양식장 규모가 큰 집은 연매출이 5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웬만한 전문직보다 많이 버는 셈이다. 천지형(46)씨는 “평일도에서도 용항마을이 소득이 높은 편”이라며 “단위 면적이 커야 고소득을 올릴 수 있고 청년들도 돌아올 정도가 된다”고 했다.
청년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용항마을에 노래방과 헬스장, 스크린 골프장을 만들었다. 섬 안에서도 도시처럼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내년에는 북카페와 족구장도 만들기로 했다.
완도군 전체적으로는 저출생·고령화로 인구가 계속 줄고 있다. 청년 기준을 19~49세로 확대하고 청년 귀향을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정인호 완도군 인구일자리정책실장은 “결국 일자리와 소득원이 핵심”이라며 “평일도에서 희망을 찾고 있다”고 했다.
창원특례시의회(의장 손태화)는 지난 21일 인구 절벽 문제에 직면한 가운데 외국인 인재와 노동력 유치 등을 위해 '출입국·이민청' 설립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김영록 의원(국민의힘, 가음정·성주동)은 이날 제143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이민자 사회통합 지원정책 마련 촉구' 건의안을 대표발의했다. 건의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김 의원은 국내 체류 외국인이 점점 늘고 있으며, 체류 유형 또한 다양해져 효율적인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인 유치가 국가 생존 전략 요소로 부각되고 있음에도 제도적 기반만 갖췄을 뿐 여전히 인프라는 부족하다고 했다.
또한, 과거에는 결혼이민자와 다문화가족 등 유형이 이민정책의 대상이었다면, 최근에는 유학생, 전문인력, 동포 등 다양해지고 있다는 게 김 의원의 설명이다.
진형익 시의원
김 의원은 "외국인이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정책, 문화적 기반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며 "정책 방향이 '몇 명에게 비자를 줄 것인가'에서 '그들이 어떻게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로 전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분산된 다양한 외국인 관련 정책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착 지원과 사회통합을 체계화할 수 있는 출입국·이민청 설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시의회는 진형익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이 대표발의한 '생활숙박시설 용도변경 제도 개선을 위한 건축물의 분양에 관한 법률 개정 촉구 건의안'을 채택했다. 건의문은 건축물분양법을 개정해달라는 내용이다.
진 의원은 최근 정부가 '생활형숙박시설 합법 사용 지원 방안'을 마련했음에도 현장에서는 정책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올해 2월 기준 전국적으로 약 11만 실 가운데 신청을 마친 사례는 2%(2132실)에 불과하다.
진 의원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법에서 규정한 '수분양자 전원 동의(100%)' 요건"이라며 "연락이 닿지 않으면 전원 동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 의원은 창원에서도 같은 문제로 주거권 침해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문제인 만큼 수분양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