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혼, 세 번의 죽음, 그리고 언제나 살아남는 단 한 사람. 정의현의 단편 「순수」는 제목이 던지는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우리가 ‘순수’에 기대하는 선명한 선의 대신, 작품은 여과되지 않은 욕망의 순수성이 얼마나 잔혹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끝내 한 사람을 ‘범인’이라 단정하지 못한 채, 이상한 찜찜함과 함께 책을 덮게 된다.


작품 개요

  • 작가: 정의현

  • 장르: 심리 스릴러/사회 심리

  • 화자: 1인칭(여성, 이름은 이경옥)

  • 핵심 설정: 화자는 세 번 결혼했고, 각 남편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죽거나 중태에 빠진다. 그러나 화자는 언제나 법적으로는 ‘참고인’이다.

  • 독자 체감 포인트: 법은 그녀를 한 번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는데, 독자는 그녀를 끝내 의심한다. 이 간극이 서사의 장력이다.


줄거리 요약(스포일러 포함)

  1. 첫 번째 남편

    토목 기사였던 남편은 빗길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사망한다. 화자는 담담하게 장례를 치르고,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한다. 슬픔 대신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다. 심지어 립스틱 색의 선택까지.

  2. 두 번째 남편

    발리에서 만난 중국계 미국인과 재혼, 캐나다로 이민. 부유하고 다정하지만 통제적이다. 화자는 운전기사와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운전기사가 남편을 골프채로 살해한다. 법원은 가해자를 처벌한다. 화자는 관련이 없다.

  3. 세 번째 남편

    대학 교수인 남편과, 그 10대 딸 안젤라가 등장한다. 화자는 ‘좋은 동거인’의 역할을 자임하지만, 가족의 균열은 심화된다. 어느 토요일, 안젤라의 방 침대 위에서 남편이 가슴을 찔린 채 발견된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화자. 법적 지위는 다시 ‘참고인’이다.

마지막 문건의 형식적 문장이 말한다.

“2002년 1월 20일. 참고인 이경옥.”

그녀는 또 살아남는다.


독법의 핵심: ‘무죄’인데 왜 불편한가

이 작품의 긴장은 법적 책임의 부재와 도덕적 의심의 축적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다. 화자는 결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의 패턴이 반복된다.

  • 상황 설정: 화자는 언제나 매우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다.

  • 감정의 절연: 눈물, 죄책감, 공감 같은 감정의 흔적이 거의 없다.

  • 언술의 관리: 모든 진술은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다. 필요한 정보만 준다.

  • 책임의 외주화: 결정적 행위는 항상 타인의 손에서 일어난다.

  • 결말의 주머니: 보험, 재산, 이사, 새 관계… 결과적으로 이득은 화자의 편에 쌓인다.

이 네 줄짜리 도식이 반복될수록, 독자는 직접 증거 없이도 그녀가 설계자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지니게 된다. 이 작품이 섬뜩한 이유다.


인물 분석

화자(이경옥)

  • 표면: 능동적, 경제감각, 생존 역량, 자기관리.

  • 심층: 공감 결핍, 자기애, 상황 장악, 언어의 통제.

  • 특징적 장면: 위기 국면일수록 감정이 아니라 절차가 먼저 움직인다(장례, 보험, 이사, 투자, 면허 취득). 위기 뒤의 ‘보상’ 동선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두 번째 남편과 운전기사

  • 통제와 복종의 관계 구도 속에서, 화자의 몇 마디(거절 아닌 거절, 가능성의 암시)가 살해의 동기 강화제처럼 작동한다. 작품은 ‘말의 힘’—더 정확히 말해 암시와 공백의 힘—으로 타인을 움직이는 기술을 보여준다.

세 번째 남편과 안젤라

  • ‘가족’이라는 안전망은 없다. 아버지-딸 관계의 음영을 여지는 남기되, 작품은 결코 확정하지 않는다. 대신 화자는 ‘양육’이 아닌 ‘거리두기’를 선택하고, 그 거리를 정확히 불편할 만큼만 유지한다. 폭발은 예고 없이 발생한다.


서사 전략: 믿기 어려운 ‘신뢰할 수 없는 화자’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하지만, 결정적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 선택적 서술: 스스로 유리한 정보 배치, 불리한 서사 공백.

  • 어조의 균질성: 장례, 여행, 소비, 사랑, 살인 현장 신고—어떤 사건을 말해도 톤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 언어의 미세한 오염: “맹세해도 좋다”는 식의 과장과 부정 확언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의심은 늘어난다.

독자는 화자의 말에서 진실을 찾는 대신, 말의 바깥에서 진실을 유추해야 한다. 이 독법 변화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주제와 메시지

  1. 욕망의 ‘순수함’은 왜 위험한가

    여기서의 순수는 도덕적 정화가 아니라 여과되지 않은 원액이다. 욕망이 순수할수록, 타인의 감정·안전·생명은 방해물로 전락한다.

  2. 법과 윤리 사이의 틈

    법은 행위자를 처벌하지만, 구도를 만든 자는 비껴간다. 이 간극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섬뜩함을 드러낸다.

  3. 언어의 힘과 책임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어떤 암시는 사람을 움직인다. 그럼 말의 기획자는 어디까지 책임인가? 작품은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남긴다.


상징과 모티프

  • 립스틱/화장: 애도 대신 관리, 슬픔 대신 제어. 몸의 경계를 그어 자신을 무미건조한 사건 처리자 위치에 놓는 장치.

  • 여행/이사/소비: 위기 뒤의 정리와 보상. 재난 직후의 ‘새 출발’이 반복되며, 그 자체가 서사의 문법이 된다.

  • 문서/절차/서명: 마지막 문장의 경찰 기록 형식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법적 현실주의의 외피다. 그 외피가 도덕적 불편을 봉한다.


문체와 효과

간결하고 냉정하며, 감탄이나 통곡의 흔적이 거의 없다. 대체로 사건 요약과 처리가 빠르고, 묘사보다 절차가 앞선다. 이 건조한 문체가 바로 공포의 근원이다. 감정의 부재는 악보다 무섭다.


총평

  • 장점: 법의 언어로 코팅된 도덕적 악을 치밀하게 구현. 독자의 해석 개입을 유도하는 공백 설계. 완결 후에도 장시간 지속되는 심리적 잔향.

  • 아쉬움: 일부 독자는 ‘정황의 반복’이 주는 추론의 공정성에 피로를 느낄 수 있다. 명시적 반전보다는 긴 의심의 꼬리가 작품의 미학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느냐가 관건.

  • 추천 독자: 심리 스릴러의 서늘함,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법과 윤리의 경계에 관심 있는 독자.


함께 생각해 볼 질문

  1. 화자는 법적으로 무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조종’은 어느 지점부터 책임이 되는가?

  3. 작품의 제목이 왜 ‘순수’여야 했을까? ‘욕망의 원액’이라는 관점 외에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4. 만약 3인의 죽음을 모두 ‘우연’로 읽는다면,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가 되는가?


한 문장 리뷰

“악은 종종 감정이 없고, 감정이 없을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잔여를 ‘순수’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