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서 緇虎까지, 건축물 이름에 의미를 담는 법
2026-09-18

집을 다 짓고 나면 의외로 어려운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이 집을 뭐라고 부를까요?” 막상 이름을 붙이려고 하면 ○○하우스, ○○재, ○○스테이처럼 익숙한 단어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집 이름 짓는 법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이름도 설계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옛 건축을 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궁궐과 전각에는 단순한 위치 표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삶과 태도를 기대하는지가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복궁 景福宮, 이름부터 건축의 방향을 말하고 있었다
경복궁(景福宮). 너무 익숙해서 이름의 뜻까지 생각해 볼 일은 많지 않습니다. ‘경복(景福)’에는 큰 복, 크고 좋은 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복’이 단순히 왕 한 사람의 행운만을 뜻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백성이 풍요롭고 좋은 정치를 경험할 때 국가와 군주도 비로소 큰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가 이름에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경복궁이라는 이름은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는 소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궁궐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라는 하나의 약속에 더 가깝습니다.
건축의 이름이 공간에 요구되는 태도까지 말해주는 셈입니다.

근정전 勤政殿, 공간의 용도가 이름이 되다
경복궁의 중심 전각인 근정전(勤政殿)도 이름이 명확합니다.
勤은 부지런할 근, 政은 정사 정입니다. 말 그대로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이나 국가적 의례 등 중요한 행사가 열리던 경복궁의 중심 공간입니다. 국가유산청도 근정전을 경복궁의 으뜸 전각으로 소개하며 그 이름을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린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이름과 공간의 쓰임이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건물의 이름이 장식이 아니라 그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당·재·헌, 건물 뒤의 한 글자에도 공간의 성격이 있다
우리 전통건축의 이름을 보면 마지막 글자도 제각각입니다. 근정전, 희정당, 낙선재, 정관헌처럼 말입니다.
이것도 아무렇게나 붙인 것이 아닙니다. 국가유산청은 궁궐의 건물을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 등으로 구분하며 공간의 격과 역할에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전(殿)은 가장 격이 높은 중심 건물에, 당(堂)은 그보다 조금 더 사적인 성격의 공간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단독주택 이름을 지으며 흔히 쓰는 ‘○○재(齋)’나 ‘○○헌(軒)’도 이런 문화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주택의 이름을 만든다면 단순히 한자가 멋있어서 붙이기보다 그 단어가 공간의 성격과 어울리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덕궁 昌德宮은 왜 ‘덕’을 이름에 넣었을까
창덕궁(昌德宮)의 ‘昌德’은 덕이 널리 빛나고 펼쳐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이었다면 창덕궁은 태종 때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립됐습니다. 이후 여러 왕이 오랫동안 머물며 실제 정치와 생활의 중심이 됐습니다. 국가유산청도 창덕궁이 태종 5년인 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으로 세워졌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름이 재미있어집니다.
건물의 이름은 이미 완성된 사람을 칭찬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다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건축 이름을 지을 때 “이 집이 지금 무엇인가?”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집에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도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집 이름은 대지와 공간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단독주택 설계를 하면서 이름을 정한다면 처음부터 멋있는 한자부터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설계 과정에서 반복해서 등장했던 말을 모아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대지 — 바다, 산, 골목, 언덕, 숲, 들판
빛 — 아침빛, 석양, 달빛, 그늘
공간 — 마당, 중정, 테라스, 긴 창, 계단
재료 — 돌, 나무, 벽돌, 철, 콘크리트
사람 — 가족의 기억, 취미, 생활방식, 앞으로 만들고 싶은 일상
예를 들어 설계의 중심이 ‘아침 햇빛이 중정을 지나 거실까지 들어오는 집’이었다면 이름의 시작도 빛·아침·마당 같은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배치와 창의 방향을 결정한 집이라면 그 집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해(海)’일 수도 있습니다.
이름을 먼저 만들고 건축의 의미를 억지로 끼워 맞추면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건축에서 이름이 나와야 합니다.
치호건축사사무소가 생각하는 건축 이름의 순서
대지를 읽고 → 공간의 중심을 찾고 → 건축주의 이야기를 듣고 →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를 모은 뒤 → 마지막에 이름으로 압축합니다. 좋은 이름은 건축을 설명하기 위해 추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설계 안에 들어 있던 이야기를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치호건축사사무소’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할까
저희 사무소의 이름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치호건축사사무소의 ‘치호’는 한자로 다음과 같이 씁니다.
緇 虎
緇 — 검은 비단 치 虎 — 범 호
緇(치)는 검은 비단을 뜻합니다. 비단이라는 재료를 떠올리면 가느다란 실들이 촘촘하게 모여 하나의 면을 만듭니다.
건축 역시 비슷합니다. 평면 하나만으로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 재료, 방수, 단열, 창호, 빛, 동선, 설비 그리고 수많은 작은 접합부가 모여 하나의 공간을 만듭니다.
그래서 치호건축사사무소에서는 緇를 건축적으로 섬세함, 재료에 대한 감각, 깊이, 디테일이라는 이미지로 읽습니다.
虎, 범처럼 단단한 기준도 건축에는 필요하다
虎(호)는 범, 즉 호랑이입니다.
호랑이에서는 자연스럽게 힘과 기개, 강인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건축사에게도 이런 성격이 필요합니다. 구조와 안전을 판단해야 하고, 법규를 검토해야 하며, 인허가 과정에서는 수많은 조건을 조정해야 합니다. 공사가 시작된 뒤에는 도면과 현장 사이에서 계속 선택해야 합니다.
예쁜 공간을 생각하는 섬세함만큼이나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지 결정하는 단단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虎는 치호건축사사무소에서 원칙, 판단력, 구조적 안정감, 그리고 설계를 현실의 건축까지 끌고 가는 힘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緇虎, 비단처럼 섬세하게 범처럼 단단하게
두 글자를 함께 놓으면 치호라는 이름의 성격이 더 분명해집니다.
緇 — 섬세함 虎 — 강인함
하나는 작은 것을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전체를 지탱합니다.
하나는 재료와 디테일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구조와 원칙을 세웁니다.
緇虎는 ‘섬세함과 단단함이 함께 있는 건축’을 만들어가겠다는 치호건축사사무소의 이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이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緇虎 ARCHITECTURE
비단처럼 섬세하게. 범처럼 단단하게.
좋은 집 이름은 결국 그 집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창덕궁(昌德宮).
수백 년이 지나도 이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함께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단독주택도 규모만 다를 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이 오랫동안 살아갈 집이라면 주소 외에 하나의 이름을 가져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그냥 예뻐서”가 아니라 왜 이런 집을 지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쌓이게 됩니다.
건축을 시작한다면 한 번쯤 이런 질문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 집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장면은 무엇일까?”
그 장면을 찾는 순간, 집의 이름도 이미 절반쯤 만들어져 있을지 모릅니다.
치호건축사사무소 緇虎建築士事務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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