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은 조연, 여백이 주연

작성일: 2026-03-07 01:32:05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앤디 피셔. 아이들의 낙서처럼 보이는 단순한 그림들은 기존의 회화적 관습을 비튼 '유쾌한 반항'으로 평가받는다. 김정훈 기자

충만한 햇살을 자랑하는 햇님, 귀여운 발로 아장아장 걷는 악어, 귀를 쫑긋 세운 개처럼 보이는 늑대, 어눌해 보이는 줄무늬 초록뱀…. 노랑·빨강·초록·파랑 등 밝은 원색 컬러로 그린 그림들은 아이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한 듯 단순하고 투박하고 거칠다. 그래서 편하고 친숙하다. 빙그레 웃음도 난다. 4일부터 4월 11일까지 서울 한남동의 갤러리바톤에서 열리는 앤디 피셔(38)의 개인전 ‘실패도 나쁘지 않아:FeilGood’의 첫 인상이다.

2018년 베를린 예술대학교를 졸업한 피셔는 토이 베를린 마스터즈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유럽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밑칠을 최소화한 캔버스에 원색의 오일 스틱과 연필로 동물과 사물의 평면적 이미지를 담백하게 그려내는 방식은 피셔의 트레이드마크다.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빈 공간이 여백을 미완성의 증거로 간주해온 서양 회화의 관습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유머가 있는 반항’ ‘유쾌한 전복’은 피셔의 작품들을 수식하는 공통된 키워드들이다. 전시 제목 ‘실패도 나쁘지 않아: Feil Good’에도 그만의 유쾌한 반항심이 깔려 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눈치 차렸겠지만 ‘Feil’은 단어 ‘Fail(실패)’에서 a를 e로 일부러 바꿔 놓은 표현이다. “실패가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전제라는 의미죠.”

어린아이의 순진함이 묻어나는 단순한 그림들 역시 신과 영웅의 서사로 가득한 서구 회화의 오랜 관습과 전통을 비튼 영리한 반항이다. 비례·구도·서사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하는 고전 회화와는 달리 피셔의 그림은 연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등 대충 그린 듯 보인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본 대중이라면 ‘나도 그릴 수 있겠다’ 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피셔가 의도한 가짜 순진함에 제대로 속은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듯 보이는 그림은 자유로움의 상징이자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진 갤러리바톤]

서양의 고전 회화에서 주인공은 신 또는 인간이다. 동물들은 이야기상 필요하긴 하지만 부여 받은 역할은 작다. 그래서 화면 구도상 외곽에 위치한다. 피셔는 고전 회화에서 장식물처럼 소외됐던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의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까마귀·뱀·악어·호랑이·늑대 등은 독일 태생의 유명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피셔의 고향인 뉘른베르크 출신)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속에서 끄집어낸 동물들이다.

자신의 그림 속에서 새롭게 주인공이 된 동물들에게 피셔는 현대회화에 걸맞은 서사도 입혔다. 고전 회화 속에서 흔히 쓰였던 뱀의 사악함, 까마귀의 불길함 같은 이미지는 다 걷어버리고 오로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만 부각시킨 서사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가 막 시작되기 전 중간 지대(사이)의 긴장감’이에요. 하나의 캔버스에 들어가 있는 동물들이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몰라요.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은 까마귀와 뱀 사이에 어떤 우정이 존재할지, 아니면 한바탕 혈투를 벌일지 그건 저도 몰라요. 관람객이 이들의 관계를 상상해 보도록 유도하는 게 작가로서의 내 역할이죠.”

캔버스에 담은 ‘사이의 긴장감’은 동물들의 관계만은 아니다. 머리 위에 태양이 반짝이지만 발은 빗물 웅덩이에 담고 있는 늑대 그림도 있다. “태양은 성공·긍정의 상징이고 비는 우울함·실패의 상징이죠. 태양과 비 사이에 늑대의 인생이 존재하는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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