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순수》 [소설] - 세 번 결혼한 내가 이상한 여자 같아요?

작성일: 2025-10-08 22:15:51

세 번의 결혼, 세 번의 죽음, 그리고 언제나 살아남는 단 한 사람. 정의현의 단편 「순수」는 제목이 던지는 기대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우리가 ‘순수’에 기대하는 선명한 선의 대신, 작품은 여과되지 않은 욕망의 순수성이 얼마나 잔혹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는 끝내 한 사람을 ‘범인’이라 단정하지 못한 채, 이상한 찜찜함과 함께 책을 덮게 된다.


작품 개요


줄거리 요약(스포일러 포함)

  1. 첫 번째 남편

    토목 기사였던 남편은 빗길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사망한다. 화자는 담담하게 장례를 치르고,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한다. 슬픔 대신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다. 심지어 립스틱 색의 선택까지.

  2. 두 번째 남편

    발리에서 만난 중국계 미국인과 재혼, 캐나다로 이민. 부유하고 다정하지만 통제적이다. 화자는 운전기사와 관계를 맺는다. 어느 날 운전기사가 남편을 골프채로 살해한다. 법원은 가해자를 처벌한다. 화자는 관련이 없다.

  3. 세 번째 남편

    대학 교수인 남편과, 그 10대 딸 안젤라가 등장한다. 화자는 ‘좋은 동거인’의 역할을 자임하지만, 가족의 균열은 심화된다. 어느 토요일, 안젤라의 방 침대 위에서 남편이 가슴을 찔린 채 발견된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화자. 법적 지위는 다시 ‘참고인’이다.

마지막 문건의 형식적 문장이 말한다.

“2002년 1월 20일. 참고인 이경옥.”

그녀는 또 살아남는다.


독법의 핵심: ‘무죄’인데 왜 불편한가

이 작품의 긴장은 법적 책임의 부재와 도덕적 의심의 축적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다. 화자는 결코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다만 다음의 패턴이 반복된다.

이 네 줄짜리 도식이 반복될수록, 독자는 직접 증거 없이도 그녀가 설계자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지니게 된다. 이 작품이 섬뜩한 이유다.


인물 분석

화자(이경옥)

두 번째 남편과 운전기사

세 번째 남편과 안젤라


서사 전략: 믿기 어려운 ‘신뢰할 수 없는 화자’

화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말하지만, 결정적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독자는 화자의 말에서 진실을 찾는 대신, 말의 바깥에서 진실을 유추해야 한다. 이 독법 변화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주제와 메시지

  1. 욕망의 ‘순수함’은 왜 위험한가

    여기서의 순수는 도덕적 정화가 아니라 여과되지 않은 원액이다. 욕망이 순수할수록, 타인의 감정·안전·생명은 방해물로 전락한다.

  2. 법과 윤리 사이의 틈

    법은 행위자를 처벌하지만, 구도를 만든 자는 비껴간다. 이 간극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섬뜩함을 드러낸다.

  3. 언어의 힘과 책임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어떤 암시는 사람을 움직인다. 그럼 말의 기획자는 어디까지 책임인가? 작품은 답을 주지 않고 질문을 남긴다.


상징과 모티프


문체와 효과

간결하고 냉정하며, 감탄이나 통곡의 흔적이 거의 없다. 대체로 사건 요약과 처리가 빠르고, 묘사보다 절차가 앞선다. 이 건조한 문체가 바로 공포의 근원이다. 감정의 부재는 악보다 무섭다.


총평


함께 생각해 볼 질문

  1. 화자는 법적으로 무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조종’은 어느 지점부터 책임이 되는가?

  3. 작품의 제목이 왜 ‘순수’여야 했을까? ‘욕망의 원액’이라는 관점 외에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4. 만약 3인의 죽음을 모두 ‘우연’로 읽는다면, 이 소설은 어떤 이야기가 되는가?


한 문장 리뷰

“악은 종종 감정이 없고, 감정이 없을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잔여를 ‘순수’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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